영화 '크래쉬'는 성도착증의 하나인 페티시즘을 주제로 한 영화다. 개봉 당시 많은 논란을 불렀다. 1953년 킨제이 보고서는 다윈의 보고서 이후 가장 충격적이라고 평가받는데, 인간의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조사하여 그동안의 성에 대한 도덕과 규범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신과협회는 그 기준을 밝혔고, 진단기준을 세웠다.
영화 '크래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NC-17 (17세 미만 관람금지) 등급 영화 '크래쉬 Crash'는 1996년 제작된 스릴러 영화다. 제임스 G. 발라드의 소설이 원작이고 1996년 제49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으나 개봉과 동시에 비판과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 이유는 자동차와 파손차량을 통해 페티시즘을 느끼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방송국 프로듀서 제임스 발라드와 그의 아내 캐서린은 서로의 불륜 행각에 성적 자극을 받는 독특한 성생활을 즐긴다. 어느 날, 제임스는 운전 도중 교통사고가 나는데, 상대방 차는 여의사 헬렌 레민턴과 그의 남편이 타고 있었다. 헬렌의 남편은 차에서 튕겨져 나와 사망했고, 헬렌은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제임스는 그런 헬렌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야릇한 성 충동에 사로잡힌다. 회복차 입원한 병원에서 헬렌과 제임스는 가까워지고 불륜으로 치닫는데 헬렌은 그녀와 차에서 성관계를 가졌던 모든 남자들을 이야기하며 제임스를 흥분시킨다. 두 사람은 자신들 모두가 자동차 사고나 고속도로 사망사고에 관련된 장비인 앰뷸런스, 화염, 소방차 등에 의해서 성적으로 흥분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점점 더 일탈적인 하위문화로 빠져들어 금속이나 자동차 그리고 자동차 사고에 대한 성적 환상을 나누게 된다.
이 영화는 페티시즘이라는 주제뿐만 아니라 노출증, 관음증, 트로일리즘, 동성애를 함께 그리고 있다. 영화는 시체성애증을 암시하면서 끝이 난다. 제임스는 의도적으로 아내의 스포츠카를 무서운 속도로 운전해 아내가 차 밖으로 튕겨나가게 한다. 그는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뒤 의식을 잃어가는 그녀의 다친 몸에 정사를 치르며 중얼거린다. "아마 다음에는 성공할 거야, 여보, 다음에는 말이야"
페티시즘
페티시즘은 성적 도착증의 한 분류다. 성적 도착증이란 일반적이지 않은 대상, 상황, 환상, 행동을 통해 성(性)적 흥분을 경험하는 증상이다. 성적 도착증을 규정하는 기준 및 분류 방식은 지금까지 논쟁 중이며 이는 문화나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다. 현재 미국정신의학회(APA,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서는 성적 도착증을 여덟 개의 항목으로 분류한다.
1) 관음증(voyeuristic disorder): 타인의 사적인 활동을 몰래 엿보는 행동이나 환상에 반복적으로 몰입하여 성적 흥분을 느끼는 증상이다.
2) 노출증(exhibitionistic disorder): 자신의 성기를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낯선 사람에게 노출하고 싶은 충동을 반복적으로 느끼는 증상이다.
3) 마찰도착증(frotteuristic disorder): 자신의 성기나 신체 일부를 접촉하거나 문지르는 행위나 환상에 반복적으로 몰입하여 성적 흥분을 느끼는 증상이다.
4) 성적 피학증(마조히즘/sexual masochism disorder): 성행위 시 타인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 및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얻는 증상이다.
5) 성적 가학증(사디즘/sexual sadism disorder): 성행위 시 타인에게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 및 고통을 가함으로써 성적 만족을 얻는 증상이다.
6) 소아기호증(pedophilic disorder): 흔히 소아성애로 불린다. 2차 성징이 발현하기 이전의 아이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증상이다.
7) 물신증(fetishistic disorder): 흔히 페티시즘으로 불린다. 신체 일부나 물건을 성적인 대상으로 인식하는 증상이다.
8) 복장도착증(transvestic disorder): 이성의 복장을 착용하며 성적으로 흥분하는 증상이다. 성적 흥분과 무관하게 다른 성별의 옷을 입는 것을 즐기는 크로스드레싱(cross-dressing)과는 구별된다.
페티시(fetish)란 용어는 원래 숭배의 대상이 되는 자연적, 인공적 물건을 가리킨다. 페티시는 '주물', '연물', '물신'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만일 이런 물건을 획득하면 갖가지 질병과 해악을 피할 수 있는 주술적인 힘을 갖게 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페티시즘은 원시종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에서 페티시즘은 성적인 대상을 물건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페티시즘은 그 대체된 대상을 성적으로 과대평가하며 원래의 성적 목적을 버린다고 하였다.
펜티, 실크 스타킹, 코르셋, 하이힐 또는 의복의 고무 부분이나 정상적인 성행위와 관계없는 신체 부위(머리카락, 발 또는 절단된 사지의 남은 부분)처럼 무생명체를 포괄한다. 일반적으로 페티시즘과 성행위 간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추측되지만, 어떤 환자는 서류함이나 유모차, 금속류처럼 모호한 자극에도 성적 흥분이 된다고 보고한다.
원인과 치료
페티시즘을 포함한 모든 성도착증의 인과관계나 특이도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생물학적 요인을 하나의 원인으로 본다. 도파민과 세로토닌 불균형 그리고 유전적 요인이다. 심리적인 요인으로는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나 충격적인 경험, 부모와의 불안정한 관계, 낮은 자존감, 강한 스트레스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사회문화적 요인을 들 수 있는데, 일부 문화에서는 성적인 행위에 대한 규범이 다를 수 있으며 이는 개인의 성적인 인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전통 정신분석 관점에서는 관음증이나 노출증의 원인을 거세 불안에 대한 비정상적인 성적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치료로는 정신치료적 요법을 통해 이상 성행동의 근원이 되는 원인에 대한 치료를 시행한다. 인지행동 요법이나 그룹 치료도 경우에 따라 도움이 될 수 있다. 약물 치료가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킨제이 보고서
킨제이 보고서는 미국의 동물학자 앨프리드 찰스 킨제이가 사람들의 성적 행위에 대해 조사한 1948년에 펴낸 <남성의 성적 행동>과 1953년에 출간한 <여성의 성적 행동> 2권의 책이다. 그동안 금기시되던 주제를 다룬 책의 출간에 미국 사회가 놀랐지만, 내용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성애 및 금욕생활이 도덕적이고 일반적인 규범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깨뜨렸고, 현재는 매우 당연한 여성에게도 성욕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1953년의 킨제이 보고서는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청교도적 도덕관, 성윤리에 엄청난 균열을 내면서 경구 피임약, 성인잡지 '플레이 보이'의 창간뿐 아니라 1960년대 성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이 보고서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 이후 가장 충격적인 보고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동성애자에 대한 정의를 왜곡하는 등 동성애 혐오적 태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으며, 대상 선정에서 무작위 선정이 아닌 의도된 대상들을 선정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보고서의 신빙성 논란도 있었다.
비정상의 기준
킨제이 보고서가 충격이었던 이유는 당시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의 성행위가 적나라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정상적인 행동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과거에 비해 모호해졌다. 개인 취향의 다양성도 있지만, 사회, 시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기준을 만들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동성애는 한 때 비정상적 성 행동으로 생각되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미국 정신과 협회에서 정한 진단기준은 노출증, 관음증, 접촉 도착증, 소아성애증, 성적 가학증, 성적 피학증, 페티시즘, 이성복장 착용증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음란전화, 수간, 시체애 등을 성도착증으로 분류한다.
성도착증에서는 그 비정상적인 성 행동과 관련된 환상이나 충동이 생활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적어도 6개월 이상 계속, 반복적으로 그 비정상적인 성행동이나, 행동과 관련된 성적인 환상이나 충동을 보인다. 그리고 그 환상이나 충동에 집착하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그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비정상적인 성적 환상이나 충동 때문에 본인이 괴로워하거나 인간관계 등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라면 비정상의 기준이 된다. 치료를 요한다.